본문 바로가기
2023.03.06 06:34

“김”

조회 수 127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079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5672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0566
3344 인과와 편향, 같잖다 風文 2022.10.10 821
3343 사람, 동물, 언어 / 언어와 인권 風文 2022.07.13 825
3342 올해엔 저지른다, ‘죄송하지만’ 風文 2022.08.04 825
3341 편견의 어휘 風文 2021.09.15 831
3340 마그나 카르타 風文 2022.05.10 831
3339 순직 風文 2022.02.01 832
3338 ‘폭팔’과 ‘망말’ 風文 2024.01.04 832
3337 부사, 문득 風文 2023.11.16 835
3336 배뱅잇굿 風文 2020.05.01 836
3335 ‘파바’와 ‘롯리’ 風文 2023.06.16 837
3334 ‘끄물끄물’ ‘꾸물꾸물’ 風文 2024.02.21 837
3333 개헌을 한다면 風文 2021.10.31 839
3332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미래를 창조하는 미래 風文 2022.05.17 839
3331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風文 2022.08.05 840
3330 역사와 욕망 風文 2022.02.11 841
3329 말과 공감 능력 風文 2022.01.26 843
3328 주시경, 대칭적 소통 風文 2022.06.29 844
3327 외국어 선택, 다언어 사회 風文 2022.05.16 849
3326 동무 생각, 마실 외교 風文 2022.06.14 849
3325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風文 2022.06.20 849
3324 상석 風文 2023.12.05 850
3323 뒷담화 보도, 교각살우 風文 2022.06.27 85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