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1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특성화고 3학년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인터넷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방어(방해? 저지?)’하는 부서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 탐색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 치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숫자가 책임자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사람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숫자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다. 성과지표 합격률 취업률 가입률 지지율 인상률 연봉 같은 것들에 가슴이 뛴다.

영화의 매력은 제목에서 나온다. 피해자를 내세우고 ‘그다음 피해자는 누구냐?’며 다그치는 제목이라면 ‘소희 다음’ 정도면 될 텐데. 이상하다, ‘다음 소희’라니.

흔히 ‘다음’ 뒤에 오는 명사는 ‘다음 기회, 다음 정류장, 다음 사람, 다음 생’처럼 일반명사들이다. ‘다음 기회’는 지금과 다른 계기를 맞이할 듯하고, ‘다음 정류장’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 ‘다음 피해자’라면 다른 인물이 다른 사건을 비극적으로 만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뒤에 ‘소희’라는 고유명사를 박아 넣었다. 이렇게 되니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 개별성이 사라졌다. 회로 변경의 가능성을 끊고 마개를 닫아버렸다. ‘당신 = 다음 소희’. ‘소희 다음’은 당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음 소희’는 반드시 당신이라고 들린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소희다. 버둥거려봤자 소용없다. 다음도 소희, 그다음도 다시 소희. 무한 반복하고 무한 회귀하는 소희. 구제불능 사회의 절망감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새로운 문법으로 표현하다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524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6059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0959
3278 적과의 동침, 어미 천국 風文 2022.07.31 910
3277 웃어른/ 윗집/ 위층 風文 2024.03.26 910
3276 북한의 ‘한글날’ 風文 2024.01.06 911
»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風文 2023.02.27 913
3274 언어의 혁신 風文 2021.10.14 914
3273 노동과 근로, 유행어와 신조어 風文 2022.07.12 914
3272 더(the) 한국말 風文 2021.12.01 919
3271 뒤죽박죽, 말썽꾼, 턱스크 風文 2022.08.23 920
3270 왕의 화병 風文 2023.11.09 921
3269 김치 담그셨어요? 風文 2024.02.08 921
3268 태극 전사들 風文 2022.01.29 925
3267 뒷담화 風文 2020.05.03 928
3266 가던 길 그냥 가든가 風文 2024.02.21 929
3265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風文 2022.08.28 930
3264 갑질 風文 2024.03.27 932
3263 법과 도덕 風文 2022.01.25 934
3262 말의 세대 차 風文 2023.02.01 934
3261 있다가, 이따가 風文 2024.01.03 937
3260 혼성어 風文 2022.05.18 938
3259 야민정음 風文 2022.01.21 939
3258 정당의 이름 風文 2022.01.26 939
3257 호언장담 風文 2022.05.09 94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