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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빼”

합기도(aikido) 선생님은 몸의 신통방통함을 간단한 실험으로 보여주곤 한다. 숨을 들이쉬는 사람을 손으로 밀면 쉽게 뒤로 밀리지만, 내쉴 때 밀면 잘 밀리지 않는다(해보시라!). 몸무게는 변함없건만, 숨을 내뱉기만 해도 몸이 묵직해진다. 모든 수련은 경직된 힘을 빼는 과정, ‘비움’의 연습이다. 몸의 어느 한 곳에 힘을 주기보다는 몸 전체가 하나의 기계가 되어야 한다.

우리말은 힘을 마치 보이는 대상처럼 표현한다. 힘은 어딘가에 존재하며(있다, 없다), 생성하며(나다, 솟다), 사용과 변형을 거듭한다(쓰다, 들다, 주다, 받다, 합하다). 모든 생명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기를 쓴다. 숟가락 들 힘이든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든, 인간은 힘을 획득하고 과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죽음은 힘의 상실이자 기운의 소멸(역설적이게도 주검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풍선은 바람이 빠지면 순식간에 쪼그라들지만, 몸은 힘을 빼도 쪼그라들지 않는다. ‘탈진’, ‘맥 풀림’, ‘축 처짐’과 다르다. 그릇이 속이 비어도 그대로이듯이,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다. 허리가 펴지고 등이 곧추선다. 힘 빼기는 내 뼈에 끈덕지게 눌어붙어 있는 독기를 떼어내고, 깃털의 깃대처럼 뼈를 공백으로 전환시키는 일. 비움이야말로 거짓 힘을 가로지르는 진짜 힘이다. 몸에 힘을 빼면 말에도 힘을 뺄 수 있다. 그러니 헛심 쓰지 말고 ‘힘 빼!’

(*힘 빼면 얻는 효과: 1. 멀리 넓게 볼 수 있음. 2. 순발력이 생김. 3. 용쓰는 자를 알아볼 수 있으니, 노골적 힘이 난무하는 이 삼류 무림세계도 그냥저냥 살아낼 수 있음.)


작은, 하찮은

접미사는 단어에 뿌리는 향신료다. ‘돌멩이’에 쓰인 ‘-멩이’처럼 어떤 말(어근) 뒤에 들러붙어 미세한 의미를 얹는다. 후춧가루처럼 애초의 의미에 풍미를 더하며 말맛을 살아나게 한다.

그중에는 대상이 보통의 크기보다 작다는 걸 표시하는 게 있다. 축소접미사라 이르는데, 이탈리아어에 흔하다. ‘빌라’(villa)보다 작은 규모의 집을 ‘빌레타’(villetta)라 하거나, 교향곡인 ‘신포니아’(sinfonia)와 달리 현악기 몇개로만 연주하는 소규모 교향곡을 ‘신포니에타’(sinfonietta)라 하는 식이다.

한국어에는 새끼를 뜻하는 단어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병아리’에 쓰인 ‘-아지’, ‘-아리’ 같은 접미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은 것은 귀엽고 친근하기도 하지만, 미숙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 건 쉽게 낮잡아 보인다.

‘-아지’는 동물 아닌 대상에도 쓰이는데, ‘꼬라지’(꼴), ‘모가지’(목), ‘싸가지’(싹) 같은 말을 보면 대상을 속되게 일컫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리’가 들어간 ‘이파리(잎), 매가리(맥), 쪼가리(쪽)’에도 대상을 하찮게 여기는 게 묻어 있다. 축소접미사라 하긴 어렵지만, ‘무르팍(무릎), 끄덩이(끝), 끄트머리(끝), 배때기, 사타구니(샅), 코빼기’ 같은 말에 쓰인 접미사에도 대상을 속되게 부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향신료가 음식의 풍미를 좌우하듯, 접미사엔 감정이 묻어 있다. 접미사가 있는 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뭐든 작은 게 결정적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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