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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과 야생, 학교

부모는 아이가 타인과 적절히 교류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걸 돕는다. 이러한 사회화는 대부분 말로 이루어지므로 사회화의 핵심은 언어 학습이다. 사회화와 언어 학습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이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자녀 양육을 ‘온실 모형’과 ‘야생 모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온실 모형 속 부모는 아이를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는 식물로 대한다. 부모는 아이와 말을 많이 나눈다. ‘이게 뭐예요?’라 물으면 친절히 설명해주고 ‘네 생각은 어떠냐?’고 되묻는다. 질문과 설명 중심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자기 생각을 잘 드러낸다. 틈나는 대로 ‘잠자리에서 책 읽어주기’를 한다. 공룡이든 자동차든 ‘꼬마’ 전문가가 되는 걸 대견해한다. ‘티라노사우루스’, ‘안킬로사우루스’의 습성과 생김새, 생존 시기를 좔좔 외면 환호한다.

야생 모형 속 부모는 아이를 대지의 비바람과 햇볕을 받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식물로 대한다. 아이는 가만히 ‘냅두면’ 알아서 자란다. 아이의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다른 관계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길 바란다.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주지 못한다. 집 안은 대체로 조용하다. 대화보다는 지시와 명령의 말이 많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데 서툴다.

물론 현실에선 두 모형이 뒤섞여 있다. 다만, 온실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인정과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건 분명하다. 집에서 이미 연습했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학교는 말을 둘러싼 사회적 격차를 좁히고 있나, 더 벌리고 있나?



의미의 반사

솔직히 의미는 ‘별것’이 아니다. 팔랑귀다. 시시때때로 변한다. 의미는 사전에 실린 뜻풀이가 아니다.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말과 세계 사이도 헐겁다. 그 사이를 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실천이 채운다. 그래서 의미는 가변적이고 사회적이다.

검찰 개혁에 비판 게시글을 쓴 검사에게 “이렇게 커밍아웃해 주시면 개혁만이 답입니다”라고 한 장관의 말이 구설에 올랐다. 글쓰기 선생 눈에는 문장이 어색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뭔 말이지?), 사람들에게는 ‘커밍아웃’이란 말이 문제였다. 이 말이 반복되어 쓰이자, 성소수자 단체와 진보정당에서 “커밍아웃이 갖는 본래의 뜻과 어긋날뿐더러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걸어온 역사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의미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 소수자의 희생과 저항의 역사가 담긴 언어도 예외일 수 없다. 오용이나 퇴행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소수자들도 자신을 향한 혐오 발언을 낚아채서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발언의 효과를 없앴다. 밥에 돌 씹히듯 들리겠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를 빼앗아 ‘(그럼) 이건 나라냐?’라고 되받아친다. 자신에게 유리한 의미를 퍼뜨리기 위해 열심히 투쟁 중이다.

벽에 박아놓은 못처럼 의미를 고정시켜놓을 수 없다. 멋대로라는 뜻도, 그냥 놔두라는 뜻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지식, 신념, 취향, 계급,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말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말은 이 모든 의미투쟁의 결과물이자 정치사회적 윤리의 문제와 닿아 있다. 의미는 팔랑귀지만 귀가 밝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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