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4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잃어버린 말 찾기

단어가 잘 안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요즘엔 더 잦아졌다. 뇌 기능이 조금씩 뒷걸음질친다. 수업 때 수십 종의 개 이름을 다다닥 읊어주고 그걸 그저 ‘개’라고만 하는 말의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은 ‘발바리’밖에 없었다. ‘풍산개, 삽살개, 셰퍼드, 불도그, 푸들, 닥스훈트’, 하다못해 ‘진돗개’는 어디로 갔나.

그래도 말에 장애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있다. 허공에 빈손 휘젓듯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보면 상실된 것 주변에 아직 상실되지 않은 나머지들이 날파리처럼 몰려드는 걸 보게 된다. 머릿속 낱말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흔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딴 말로 풀어 말한다. 일종의 번역인데 ‘칼’이란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뾰족하게 생겨 뭘 자르는 거!’라는 식이다. 비스름한 말만 맴돌기도 한다. ‘강박’이란 말이 안 떠올라 ‘신경질, 편집증, 집착’이, ‘환멸’ 대신에 ‘혐오, 넌덜머리, 염증’이란 말만 서성거린다. 비슷한 소리의 단어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속물’이란 단어가 안 떠올라 첫 글자가 ‘ㅅ’인 ‘사람, 선물, 사탄, 사기’란 말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혼자 하는 말잇기놀이 같다.

부부의 대화 중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 스무고개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다. 상실된 말 주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모이지 않으면, ‘그때 걔, 있잖아 걔’, ‘아, 거 그거, 뭐시기냐 그거’ 이렇게 될 거다. 침묵으로 빠져들기 전, 마지막까지 내 혀에 살아남을 말이 뭘지 궁금하다. 부디 욕이 아니길.



‘영끌’과 ‘갈아넣다’

말에는 허풍이 가득하고 인간은 누구나 허풍쟁이이다. 보고 들은 걸 몇 곱절 뻥튀기하고 자기 일은 더 부풀린다. ‘아주 좋다, 엄청 많다’고 하면 평소보다 더한 정도를 표현한다. 하지만 ‘아주, 엄청, 매우, 무척, 너무’ 같은 말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 더 감각적인 표현들이 있다.

이를테면 ‘뼈 빠지게 일하다, 등골이 휘도록 일하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목이 터져라 외치다, 죽어라 하고 도와주다, 쎄(혀) 빠지게 고생한다’고 하면 느낌이 팍 온다. 화가 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진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고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이 드나든다. 사진을 보듯 생생하지만 과장이 심하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는 뜻으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이나 ‘갈아 넣다’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장롱 밑에 굴러 들어간 동전까지 탈탈 털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할 수는 있지만,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갈아 넣어서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혼을 담은 시공’이라는 건설 광고판을 보며 들었던 두려움과 죽음의 정서와 겹친다.

과장된 말처럼 현실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많다. 탈진할 때까지 힘을 써야 하고 등골이 휘어져도 참아야 하고 영혼마저 일에 갈아 넣어야 하는 사람들. 매순간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사회.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건 부동산도 일도 아니다. 뼈도 힘도 영혼도 어디다 빼앗기거나 갈아 넣지 말고 고이 모시고 집에 들어가자. 세상이 허풍 떠는 말을 닮아간다. 허풍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십중팔구 비극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63952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225258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07Sep
    by 風文
    2022/09/07 by 風文
    Views 1467 

    다만, 다만, 다만, 뒷담화

  5. No Image 01Jun
    by 風文
    2020/06/01 by 風文
    Views 1468 

    깻잎 / 기림비 1

  6. No Image 31Oct
    by 風文
    2021/10/31 by 風文
    Views 1468 

    개헌을 한다면

  7. No Image 19Jun
    by 風文
    2022/06/19 by 風文
    Views 1473 

    성인의 외국어 학습, 촌철살인

  8. No Image 26Jul
    by 風文
    2022/07/26 by 風文
    Views 1473 

    날아다니는 돼지, 한글날 몽상

  9. No Image 01Feb
    by 風文
    2023/02/01 by 風文
    Views 1473 

    말의 세대 차

  10. No Image 30Oct
    by 風文
    2021/10/30 by 風文
    Views 1475 

    소통과 삐딱함

  11. No Image 17May
    by 風文
    2022/05/17 by 風文
    Views 1476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미래를 창조하는 미래

  12. No Image 05Aug
    by 風文
    2022/08/05 by 風文
    Views 1476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13. No Image 30May
    by 風文
    2022/05/30 by 風文
    Views 1477 

    북혐 프레임, 인사시키기

  14. No Image 10Jun
    by 風文
    2022/06/10 by 風文
    Views 1477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15. No Image 26May
    by 風文
    2020/05/26 by 風文
    Views 1479 

    좋은 목소리 / 좋은 발음

  16. No Image 27Aug
    by 風文
    2022/08/27 by 風文
    Views 1479 

    짧아져도 완벽해, “999 대 1”

  17. No Image 15Nov
    by 風文
    2023/11/15 by 風文
    Views 1479 

    조의금 봉투

  18. No Image 11Feb
    by 風文
    2022/02/11 by 風文
    Views 1480 

    역사와 욕망

  19. No Image 10Oct
    by 風文
    2022/10/10 by 風文
    Views 1480 

    인과와 편향, 같잖다

  20. No Image 05Sep
    by 風文
    2022/09/05 by 風文
    Views 1481 

    시간에 쫓기다, 차별금지법과 말

  21. No Image 25Jan
    by 風文
    2022/01/25 by 風文
    Views 1485 

    연말용 상투어

  22. No Image 26Jun
    by 風文
    2022/06/26 by 風文
    Views 1487 

    물타기 어휘, 개념 경쟁

  23. No Image 10Nov
    by 風文
    2021/11/10 by 風文
    Views 1488 

    주어 없는 말

  24. No Image 20Dec
    by 風文
    2023/12/20 by 風文
    Views 1489 

    어떤 반성문

  25. No Image 12May
    by 風文
    2022/05/12 by 風文
    Views 1491 

    영어의 힘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