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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은 없다

모든 언어에는 인칭대명사가 있다. ‘나, 너, 그’, ‘I, You, He/She’. 이 인칭대명사가 언어의 본질로 통하는 쪽문이다.

우리 삶은 대화적인데, 언어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 상황에서 말을 한다. 대화는 말하는 이, 듣는 이, 시공간을 포함한다. 이를 뺀 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인칭대명사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라는 걸 보여 주는 증거다.

‘토끼가 씀바귀를 맛나게 먹는다.’고 할 때 ‘토끼’와 ‘씀바귀’의 개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나/너’는 언제 ‘나/너’가 되는가? 오직 ‘나/너’가 쓰인 대화 상황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밥값은 내가 낼게.’ ‘아냐, 내가 낼게.’ 같은 바람직한 장면이나 ‘밥값은 네가 내라.’ ‘아냐, 네가 내라.’ 같은 험악한 상황에서 ‘나/너’는 대화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나’와 ‘너’는 늘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한다. 순식간에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된다.

3인칭이라고 불리는 ‘그’는 전혀 다르다. 언어학자 뱅베니스트는 3인칭은 없을뿐더러, 3인칭이란 말이 인칭의 진정한 개념을 말살시켰다고 쏘아붙인다. ‘그’는 대화 상황에 없는 사람을 대신 표현하는 것이고 대화에 따라 바뀌지도 않아 진정한 인칭일 수 없다. 대화 상황에서만 생기고 수시로 변경되는 ‘나, 너’만이 인칭대명사이다.

그래서 대화 자리에 없는 ‘그’는 늘 뒷담화 대상이 된다. 끝까지 대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삶은 ‘나’와 ‘너’가 현재적으로 만드는 대화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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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일본정신

구두 신을 때와 슬리퍼 신을 때 걸음걸이가 다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고 습관이 인품을 결정한다. 말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문자를 쓰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어떤 마음의 습관을 갖는지 달라진다.

일본의 문자체계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한자’와 함께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쓴다. 히라가나는 한자가 아닌 고유어를 표시하는 데 쓴다. 가타카나는 외래어나 의성어·의태어에 쓴다. 세 가지 문자로 말의 출처를 구별하는 사회는 일본밖에 없다.

게다가 한자어를 읽는 방식이 참 고약하다. 한국어에서 ‘石’은 항상 ‘석’이지만, 일본어에서는 때에 따라 ‘세키’로도 읽고(음독), ‘이시’로도 읽는다(훈독). 음과 뜻으로 왔다갔다 하며 읽는 방식은 일본인들에게 일본 고유어를 그저 한자로 표시할 뿐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여하튼 일본어에 들어 있는 외래 요소는 한자와 가타카나로 ‘반드시’ 표시된다. ‘더우니 丈母님이랑 氷水 먹으러 cafe 가자!’라고 써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일본은 이런 식으로 천년을 써왔다. 끊임없이 외부를 확인하고 표시했다. 그만큼 외부와 다른 자신이 고유하게 있고, 자신들에게 외부의 영향에도 굳건히 지켜온 순수 상태가 있다고 확신한다.

근본을 따지는 일은 그래서 위험하다. 근본을 뒤쫓는 태도는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 자신들 모두 그곳에서 ‘출발’했고, 그곳이 가장 순수한 상태이자, 궁극적으로 ‘회귀’해야 할 곳이라고 상상하게 만든다. 천황이 그렇고 대화혼(大和魂)이 그렇고 가미카제(神風)가 그렇다. 문자가 일본정신을 만들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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