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1.30 00:16

아줌마들

조회 수 85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아줌마들

세계 여성의 날을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내 버렸다.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이 대개 이렇게 이날을 보냈을 것이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대의를 거부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사실 그 대의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흥가와 상가가 뒤엉킨 시장 골목을 다니다 보면 ‘아가씨 구함’이나 ‘아줌마 구함’ 같은 구인광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어적으로만 보면 아가씨는 미혼여성을, 아줌마는 기혼여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본다면 이 두 가지 어휘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 두 단어에는 이 땅의 여성들이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니 아줌마니 하는 말들에서는 노동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중요 개념인 ‘능력’이라든지 ‘업적’과 ‘경력’ 등의 의미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인격’과 ‘품격’조차 별로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저 여성으로서의 몸, 일하는 몸만 가리킬 뿐이다. 남성들을 가리키는 어떠한 단어들도 이처럼 비루하지는 않다.

특검이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주사 아줌마’니 ‘기 치료 아줌마’니 하는 말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아줌마’라는 말 자체가 합법성이나 전문성 따위를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깔고 있다. 아무리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호칭의 사용이 정당했는지 다시 한번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 단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민감한 주체’로서의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었다. 온갖 불법행위의 주체였던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걱정해주면서 왜 그 조역들에게는 이렇게 남루한 표현을 함부로 사용하고 말았는가?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8142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470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9589
3278 ‘선진화’의 길 風文 2021.10.15 861
3277 소통과 삐딱함 風文 2021.10.30 861
3276 영어 열등감, 몸에 닿는 단위 風文 2022.04.27 861
3275 모호하다 / 금쪽이 風文 2023.10.11 863
3274 가던 길 그냥 가든가 風文 2024.02.21 863
3273 호언장담 風文 2022.05.09 866
3272 있다가, 이따가 風文 2024.01.03 867
3271 갑질 風文 2024.03.27 870
3270 더(the) 한국말 風文 2021.12.01 871
3269 주어 없는 말 風文 2021.11.10 874
3268 반동과 리액션 風文 2023.11.25 874
3267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風文 2023.02.27 875
3266 김치 담그셨어요? 風文 2024.02.08 875
3265 거짓말과 개소리, 혼잣말의 비밀 風文 2022.11.30 877
3264 뒤죽박죽, 말썽꾼, 턱스크 風文 2022.08.23 878
3263 생각보다, 효녀 노릇 風文 2022.09.02 880
3262 왕의 화병 風文 2023.11.09 880
3261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風文 2022.08.28 885
3260 야민정음 風文 2022.01.21 888
3259 비판과 막말 風文 2021.09.15 891
3258 혼성어 風文 2022.05.18 892
3257 ‘시월’ ‘오뉴월’ 風文 2024.01.20 89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