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이, 할 일 없이
[우리말바루기] 하릴없이, 할 일 없이
얼마 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1930년대 근대화돼 가는 경성을 배경으로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소설가 구보의 하루를 담고 있다.
소설가 구보는 ‘하릴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할 일 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각각의 의미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 ‘할 일 없는’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하릴없는’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릴없다’는 “버스 파업 소식을 접하지 못한 시민들이 승강장에서 하릴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다” “내가 잘못해 일어난 상황이니 혼이 나도 하릴없는 일이다”에서처럼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또 “머리도 못 감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이 폐인의 형국이다” “누더기를 기워 입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는 거지였다”에서와 같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할 일 없이’는 말 그대로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의미로, 한 단어가 아니므로 ‘할일없이’와 같이 붙여 쓰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영락없이’로 바꿔 쓸 수 있다면 ‘하릴없이’, ‘빈둥빈둥’의 의미를 지닌다면 ‘할 일 없이’를 쓴다고 기억하면 된다. 구보는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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