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2.26 07:23

○○노조

조회 수 170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노조

굳은살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말이 굳으면 대상을 별생각 없이 일정한 이미지로 자동 해석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반노동 반노조 정서는 말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노조’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라.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나? ‘머리띠, 구호, 삭발, 파업’이 아닌, ‘친구, 맞잡은 손, 비를 피할 큰 우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노조’의 빈자리를 채우는 말을 떠올려 보라. 예전엔 ‘어용노조, 민주노조’ 정도였다면, 지금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엔 ‘부패노조’라는 표현도 등장. 진실을 감추고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말들이다.

‘귀족노조’라는 말은 의미가 이중적인 만큼 효과가 좋다. 이 말은 월급과 복지가 좋은 일부 대기업 노조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노조 전체를 특권층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도 있다(영어의 ‘노동 귀족’(labor aristocracy)이란 말은 특권화되고 보수화된 노조 간부를 뜻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도 노조가 있으면 무조건 ‘귀족노조’다. 노조를 꿈도 못 꾸는 노동자들에겐 노조 자체가 부러움과 상실감의 대상이다.

말은 투쟁만큼 중요하다. 정부와 언론의 악의적 선동이 넘치지만, 우리도 새로운 말을 발명해야 한다. 마치 칫솔처럼, 손난로처럼, 이불처럼 가깝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수식어를 찾아내어 꾸준히 써야 한다. 그러니, 송년 모임에 가는 차 안에서라도 ‘노조’의 꾸밈말로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봄이 어떨까. 나는 아직까진 문장 하나만 생각날 뿐. ‘노조는 부패한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472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11330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6055
3238 말의 평가절하 관리자 2022.01.31 1625
3237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風文 2022.07.21 1625
3236 부동층이 부럽다, 선입견 風文 2022.10.15 1625
3235 마녀사냥 風文 2022.01.13 1626
3234 귀 잡수시다? 風文 2023.11.11 1629
3233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風文 2023.11.14 1630
3232 아니오 / 아니요 風文 2023.10.08 1634
3231 세계어 배우기 風文 2022.05.11 1635
3230 대통령과 책방 風文 2023.05.12 1636
3229 마그나 카르타 風文 2022.05.10 1638
3228 도긴개긴 風文 2023.05.27 1641
3227 어떻게 토론할까, 질문 안 할 책임 風文 2022.07.24 1643
3226 외부인과 내부인 風文 2021.10.31 1644
3225 말다듬기 위원회 / 불통 風文 2020.05.22 1645
3224 세로드립 風文 2021.10.15 1645
3223 뉴 노멀, 막말을 위한 변명 風文 2022.08.14 1645
3222 아주버님, 처남댁 風文 2024.01.02 1645
3221 국민께 감사를 風文 2021.11.10 1647
3220 왜 벌써 절망합니까 - 벤처대부는 나의 소망 風文 2022.05.26 1647
3219 순직 風文 2022.02.01 1648
3218 정치와 은유(2, 3) 風文 2022.10.13 1649
3217 ‘가오’와 ‘간지’ 風文 2023.11.20 164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