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22 09:31

몰래 요동치는 말

조회 수 8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몰래 요동치는 말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1972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8349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3543
110 동무 생각, 마실 외교 風文 2022.06.14 943
109 주시경, 대칭적 소통 風文 2022.06.29 942
108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風文 2022.07.21 942
107 금새 / 금세 風文 2023.10.08 942
106 일고의 가치 風文 2022.01.07 941
105 피동형을 즐기라 風文 2023.11.11 940
104 영어의 힘 風文 2022.05.12 938
103 순직 風文 2022.02.01 937
102 시간에 쫓기다, 차별금지법과 말 風文 2022.09.05 937
101 쓰봉 風文 2023.11.16 937
100 말과 서열, 세대차와 언어감각 風文 2022.06.21 929
99 인종 구분 風文 2022.05.09 928
98 외교관과 외국어, 백두산 전설 風文 2022.06.23 928
97 물타기 어휘, 개념 경쟁 風文 2022.06.26 928
96 ‘짝퉁’ 시인 되기, ‘짝퉁’ 철학자 되기 風文 2022.07.16 927
95 국어와 국립국어원 / 왜 風文 2022.08.29 927
94 ‘~스런’ 風文 2023.12.29 927
93 비판과 막말 風文 2021.09.15 925
92 상석 風文 2023.12.05 925
91 어떤 청탁, ‘공정’의 언어학 風文 2022.09.21 924
90 대명사의 탈출 風文 2021.09.02 921
89 말과 공감 능력 風文 2022.01.26 92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