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6 09:52

부사, 문득

조회 수 87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사, 문득

부사(副詞)는 이름부터 딸린 식구 같다. 뒷말을 꾸며주니 부차적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더부살이 신세. 같은 뜻인 ‘어찌씨’는 이 품사가 맡은 의미를 흐릿하게 담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 모든(!) 글쓰기 책엔 부사를 쓰지 말라거나 남발하지 말라고 한다. 좋은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동사)로만 되어 있다는 것. 부사는 글쓴이의 감정이 구질구질하게 묻어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하면서도 마치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단다. (그러고 보니 이 칼럼의 분량을 맞출 때 가장 먼저 제거하는 것도 부사군.)

그래도 나는 부사가 좋다. 개중에 ‘문득’을 좋아한다. 비슷한 말로 ‘퍼뜩’이 있지만, 이 말은 ‘갑자기’보다는 ‘빨리’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퍼뜩 오그래이’). ‘문득’은 기억이 마음속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한다. 우리는 기억하는 걸 다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너무 깊이 있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 오른다. 그래서 ‘문득’은 ‘떠오른다’와 자주 쓰인다.

망각했던 걸 복원하는 것만으로도, ‘문득’은 성찰적인 단어다. 예측 가능한 일상과 달리, 우연히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정신없이 사는 삶을 잠깐이나마 멈추게 한다. 기억나지 않게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르면 자신이 겪어온 우여곡절이 생각난다. 작정하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유도 모르게 솟아나는 게 있다니. 나에게 그런 일이, 그런 사람이 있었지.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들었다. 기대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 인생, 허덕거리면서도 잘 살아내고 있다.

당신은 이 가을에 어떤 부사가 떠오르는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0889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7299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2418
3388 "잘"과 "못"의 띄어쓰기 바람의종 2009.08.27 23471
3387 쌓인, 싸인 바람의종 2008.12.27 23050
3386 ‘넓다´와 ‘밟다´의 발음 바람의종 2010.08.15 22584
3385 꺼예요, 꺼에요, 거예요, 거에요 바람의종 2010.07.12 22529
3384 저 버리다, 져 버리다, 처 버리다 쳐 버리다 바람의종 2009.03.24 22121
3383 고장말은 일상어다 / 이태영 바람의종 2007.07.24 22062
3382 뜻뜨미지근하다 / 뜨듯미지근하다 바람의종 2010.11.11 22012
3381 못미처, 못미쳐, 못 미처, 못 미쳐 바람의종 2010.10.18 21999
3380 상봉, 조우, 해후 바람의종 2012.12.17 21903
3379 색깔이름 바람의종 2008.01.29 21681
3378 썰매를 지치다 바람의종 2012.12.05 21468
3377 달디달다, 다디달다 바람의종 2012.12.05 21314
3376 땜빵 바람의종 2009.11.29 21294
3375 부딪치다, 부딪히다, 부닥치다 바람의종 2008.10.24 21189
3374 통음 바람의종 2012.12.21 21163
3373 지지배, 기지배, 기집애, 계집애, 임마, 인마 바람의종 2011.12.22 21063
3372 두루 흐린 온누리 바람의종 2013.01.04 20950
3371 내 자신, 제 자신, 저 자신, 너 자신, 네 자신 바람의종 2010.04.26 20946
3370 서식지, 군락지, 군집, 자생지 바람의종 2012.11.30 20856
3369 괴발개발(개발새발) 風磬 2006.09.14 20848
3368 나무랬다, 나무랐다 / 바람, 바램 바람의종 2012.08.23 20808
3367 명-태 바람의종 2012.11.23 2072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