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5 06:18

조의금 봉투

조회 수 129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조의금 봉투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상한 일이지만, 예전에도 한글로 ‘부의’라고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 봉투에 ‘슬픔을 함께합니다’라는 식의 어쭙잖은 문구를 적는다. 글자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일이겠거니 하면서(물론 별 소용 없는 일이다. 봉투의 쓸모는 ‘누가’와 ‘얼마’를 표시하는 데 있으니).

글 쓰다 죽은 어느 망자 빈소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 사이로 이런 문구의 조기를 본다. “우리 슬픔이 모였습니다. 보라, 우리는 우리의 도타운 글이 있나니.”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올려놓은 힘없는 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늘 언어 뒤를 따른다. 앞이나 옆이 아니라, 항상 뒤에 있다. 언어가 가자는 길로만 따라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새로운 말을 시도하자마자 그 또한 상투화의 길로 가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39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99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965
3304 애정하다, 예쁜 말은 없다 風文 2022.07.28 1277
3303 새로운 한자어, 이름과 실천 風文 2022.06.18 1280
3302 울면서 말하기 風文 2023.03.01 1282
3301 내일러 風文 2024.01.03 1282
3300 아줌마들 風文 2022.01.30 1284
3299 사저와 자택 風文 2022.01.30 1284
3298 국어와 국립국어원 / 왜 風文 2022.08.29 1284
3297 마그나 카르타 風文 2022.05.10 1285
3296 주시경, 대칭적 소통 風文 2022.06.29 1285
3295 국가 사전을 다시?(2,3) 주인장 2022.10.21 1285
3294 예민한 ‘분’ 風文 2023.05.29 1287
3293 말의 미혹 風文 2021.10.30 1288
3292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風文 2022.08.28 1288
3291 말하는 입 風文 2023.01.03 1289
3290 피동형을 즐기라 風文 2023.11.11 1289
3289 용찬 샘, 용찬 씨 風文 2023.04.26 1290
» 조의금 봉투 風文 2023.11.15 1293
3287 왕의 화병 風文 2023.11.09 1296
3286 까치발 風文 2023.11.20 1297
3285 꼬까울새 / 해독, 치유 風文 2020.05.25 1298
3284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風文 2022.07.21 1299
3283 거짓말과 개소리, 혼잣말의 비밀 風文 2022.11.30 130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