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0 06:48

이중피동의 쓸모

조회 수 77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중피동의 쓸모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는 특유의 저 말투로 어떤 장면을 실감나게 강조했다. 저래야 영화의 맛이 살았다. 효과 만점. 모든 표현에는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신화처럼 완고하게 전해오는 명령이 있다. ‘이중피동을 피하라!’ 한 번으로 족한데 두 번이나 피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그런가?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설명을 못 할 뿐이지 쓸모없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옛말에는 진정한 이중피동, 즉 피동접사를 겹쳐 쓰는 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닫히이다, 막히이다, 잊히이다, 눌리이다, 밟히우다, 잡히우다’. ‘닫히다, 막히다, 잊히다’ 등은 오래전부터 피동사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이 말이 피동사인지 아닌지 흐릿해지니 ‘이’나 ‘우’를 붙여 피동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듯, 말도 닳아서 애초의 쓸모가 흐릿해지면 뭔가를 덧댄다. 피동사만으로는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기엔 약해 보이니 ‘지다’를 덧붙였다. 장례를 치르는 자식이 육개장을 목으로 넘기며 “이런데도 밥이 먹혀지는군”이라고 할 수 있잖은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불가항력이랄까, 거리감의 강조랄까. 아니면, 변명의 장치랄까.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이용 ‘잊혀진 계절’).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쉽게 쓰인 시, 잊어지지 않는 눈짓, 잊힌 계절’이면 참 어색하다.

사전이나 맞춤법 검사기의 구령에 맞춰 걷지 말자. 나의 감각을 맞춤하게 담을 수만 있다면 어떤 언어도 가능하다. 삶이 그렇듯.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90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6494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1479
3388 홍일점 바람의종 2007.10.05 10622
3387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바람의종 2010.08.14 11826
3386 홀아비바람꽃 바람의종 2008.05.25 8296
3385 홀씨 바람의종 2010.03.09 15119
3384 홀몸 바람의종 2007.04.27 9359
3383 혼저 옵소예 file 바람의종 2009.11.09 10203
3382 혼신을 쏟다 바람의종 2009.03.16 7624
3381 혼성어 風文 2022.05.18 952
3380 혼동, 혼돈 바람의종 2010.05.05 12973
3379 혹성, 행성, 위성 바람의종 2010.07.21 11133
3378 호함지다 바람의종 2012.09.19 8470
3377 호프 바람의종 2011.11.21 13091
3376 호태왕비 바람의종 2008.02.17 8819
3375 호칭과 예절 바람의종 2009.03.03 8695
3374 호치키스 바람의종 2010.03.06 10002
3373 호우, 집중호우 / 큰비, 장대비 바람의종 2009.07.29 8264
3372 호언장담 風文 2022.05.09 953
3371 호스테스 바람의종 2008.02.20 11367
3370 호송 / 후송 바람의종 2010.03.06 13539
3369 호분차 온나! file 바람의종 2010.03.26 12435
3368 호박고지 바람의종 2008.01.05 8924
3367 호르몬 바람의종 2009.09.27 737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