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3.06 06:34

“김”

조회 수 174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708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0294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5289
3106 공화 정신 風文 2022.01.11 1574
3105 이 자리를 빌려 風文 2023.06.06 1577
3104 존맛 風文 2023.06.28 1581
3103 한국어의 위상 風文 2022.05.11 1583
3102 독불장군, 만인의 ‘씨’ 風文 2022.11.10 1583
3101 웃어른/ 윗집/ 위층 風文 2024.03.26 1583
3100 ‘개덥다’고? 風文 2023.11.24 1585
3099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風文 2024.02.17 1585
3098 참고와 참조 風文 2023.07.09 1586
3097 ‘걸다’, 약속하는 말 / ‘존버’와 신문 風文 2023.10.13 1586
3096 위탁모, 땅거미 風文 2020.05.07 1588
3095 8월의 크리스마스 / 땅꺼짐 風文 2020.06.06 1589
3094 질척거리다, 마약 김밥 風文 2022.12.01 1595
3093 납작하다, 국가 사전을 다시? 주인장 2022.10.20 1596
3092 ‘괴담’ 되돌려주기 風文 2023.11.01 1599
3091 열쇳말, 다섯 살까지 風文 2022.11.22 1608
3090 우리나라 風文 2023.06.21 1610
3089 좋음과 나쁨, 제2외국어 교육 風文 2022.07.08 1617
3088 4·3과 제주어, 허버허버 風文 2022.09.15 1625
3087 국어 영역 / 애정 행각 風文 2020.06.15 1626
3086 ‘외국어’라는 외부, ‘영어’라는 내부 風文 2022.11.28 1631
3085 바람을 피다? 風文 2024.01.20 163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