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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있네’와 ‘웃기고 자빠졌네’

말에는 시간의 흐름이 담긴다. 일이 벌어지기 전의 징조가 있고 일이 시작돼 진행되다가 이내 마무리되는 흐름. ‘의자에 앉으려고 한다’라는 말이 앉는 동작의 의도나 조짐이라면, ‘앉고 있다’는 앉는 동작을 계속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앉아 있다’는 앉고 나서 그대로 있을 때 쓰겠지. 보다시피, ‘~고 있다’는 어떤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걸 표시한다. ‘울고 있다’, ‘걷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파악한 시간의 조각 위에 감정을 싣는 장치가 있다. 사건 위에 분노의 감정이나 빈정거림의 정서를 보탤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 자빠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꼴사납다는 시선으로 지켜본다. 아무래도 앞으로 엎어지는 것보다 뒤로 자빠지는 게 더 아프겠지. 어느 시인은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는 비아냥에 ‘나는 계속 꿈꾸는 소리나 하다/ 저 거리에서 자빠지겠다’고 받아쳤다지(송경동). ‘놀고 엎드렸네, 놀고 누웠네’라 하면 말맛이 안 산다. ‘자빠졌네’야말로 분노의 질감을 온전히 담는다. ‘있다’와 ‘자빠졌다’ 사이에 ‘~고 앉았다’가 있지만 ‘자빠졌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무미건조하게 살던 나의 평생소원은 사람들을 제대로 웃기는 일이었다. 박장대소. 너무 웃겨 사람들이 웃다가 뒤로 자빠지는 걸 보는 거였다. 하지만 웃기려는 시도는 쉽게 비웃음을 산다. ‘걔, 웃긴 애야’라 하면 실없고 한심한 사람이 된다. ‘웃기고 자빠졌네’에 비하면, ‘웃기고 있네’는 예의 바르다고 해야 하나. 권력집단이 참사 앞에서 하는 짓을 보면 ‘웃기고 자빠졌다’는 말도 아깝다.


‘-도’와 나머지

사람은 꽉 짜인 논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끝없이 바뀌는 경험으로 세상을 익힌다. 경험은 수많은 사례를 만난다는 뜻. ‘어머니’라는 말도 ‘여성’, ‘성인’, ‘부모’, ‘자식’과 같은 논리적 속성을 합산한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익히는 게 아니다.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분과 옆집에서 본 비슷한 분,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른, 어떤 것의 시초 등을 보면서 눈덩이 굴리듯 ‘어머니’의 뜻을 넓혀 나간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 낳기만 하고 기르지는 않은 어머니, 낳지는 않았지만 길러준 어머니, 친밀감의 표시로 타인에게 던지는 어머니, 음악의 어머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등등. 전형적인 어머니에서 주변적인 어머니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이렇듯 우리 머릿속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어지는 원들로 가득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언어적 장치가 조사 ‘-도’이다. ‘너도 같이 가자!’처럼 ‘-도’는 어떤 것을 이미 있는 것에 포함시키는 포용의 장치이다. 그런데 이 포용의 장치는 무엇이 포함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세계가 중심과 주변,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뉘어 있음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여성도 할 수 있다’, ‘노인도 일하고 싶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있다’ 같은 말은 우리가 특정 범주의 가장자리에 누구를 배치해 왔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도’가 그어놓은 선 안쪽으로 대상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경계선 밖으로 빠져나가는 나머지들이 반드시 있다. ‘나머지’(주변과 잉여)를 줄여나가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치 아니겠는가.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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