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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상상하는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끝을 가늠할 수도 가닿을 수도 없구나. 바퀴 없는 자전거 타기. 달의 뒷면에 앉아 도시락 까먹기. 우리 아들의 아들로 태어나기. 배낭 메고 부산에서 출발해 강릉, 속초, 원산, 청진,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지나 모스크바까지 가기. 죽음의 길은 날아가는 걸까 걸어가는 걸까. 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새삼 알게 되지. 일상은 이다지도 진부하구나.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럴 때면 ‘안녕히’ 같은 말을 곱씹는다. ‘아무 탈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게’라는 뜻이렷다.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닐 텐데, ‘안녕히’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나?(1분 안에 열 개를 생각해 낸다면 부디 당신이 이 칼럼을 맡아주오.)

아마도 이런 말들을 떠올릴 듯.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더 쥐어짜내면 ‘안녕히 돌아가세요.’ 정도. 뭐가 문제냐고? 이런 거지. ‘안녕히 오세요.’는 왜 안 되냐고? ‘안녕히 쉬세요. 안녕히 노세요. 안녕히 일하세요. 안녕히 드세요. 안녕히 보세요.’는 왜 어색하냐고? 뜻만 보면 낯가림 없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들러붙을 듯한데, 실제론 제약이 심하군. ‘안녕히’의 친구는 기껏 네다섯일 뿐. 안녕히 갈 수는 있어도 안녕히 올 수는 없다니.

인간은 말이 만들어 놓은 이런 ‘관계의 그물’ 속에 잡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망.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제와 다르게 ‘안녕히 가세요.’ 날마다 새롭게 ‘안녕히 계세요.’


‘~고 말했다’

모든 글은 편집이다. 본 것, 그중에서 몇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사진은 카메라 앵글에 잡힌 피사체를 모두 담는다. 글은 사진보다는 요리에 가깝다. 자르고 버리고 선택하고 이어 붙여서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를 만든다.

직접 경험한 일을 쓸 때는 ‘전갱이구이가 맛있더군’처럼 ‘-더-’를 쓴다. 직접 경험했으니 확신이 있고 평가도 선명하다. 허나 어찌 세상만사를 다 경험하리. 남들한테서 들은 말을 옮기기도 하니, 이럴 땐 ‘~다고 하다’, 더 줄여 ‘~대’를 쓴다. ‘그 소설 재미있대’라 하면 나는 아직 못 읽었지만 먼저 읽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뜻이다.

기자는 사건과 함께 말의 전달자다. 취재원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우리는 기자가 그 말을 어떤 인용의 틀 속에 집어넣는지를 봐야 한다. 가장 건조하고 객관적인 틀이 ‘~고 말했다’이다. 아무리 저열한 기사라 해도 ‘~고 말했다’를 쓰면 마치 중립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은 글처럼 보인다. 반면에 이 자리에 ‘비판했다, 비난했다, 촉구했다, 반박했다, 공격했다, 꼬집었다, 비꼬았다, 몰아세웠다, 맹공을 퍼부었다’ 등을 쓰면 기자의 ‘해석’과 ‘감정’이 느껴진다. 기자의 견해가 은근히, 노골적으로 개입된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고 말했다”와 ‘부인했다’와 ‘잡아뗐다’의 격차를 느껴보시라.

눈에 힘을 빼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이 눈싸움에서 이기더라. 평정심! ‘~고 말했다’는 기자가 자기 글에 힘을 빼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다. 나는 이걸로 신문을 비교하는 게 ‘비판적 신문읽기의 첫걸음’이라고 ‘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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