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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져도 완벽해

캡슐의 발명으로 가루약 먹기가 쉽듯이, 장바구니 하나면 여러 물건을 한 손에 들 수 있듯이, 단어도 문장이나 구절로 흩어져 있는 걸 한 그릇에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약 방식의 단어 만들기에 욕심을 부린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무수한 일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움켜쥐고 싶은 마음. 날아가는 새를 잡았다는 느낌. 전에 없던 개념 하나를 탄생시켜 세계를 확장시켰다는 뿌듯함. 부질없는 만큼 매력적이니 멈출 수가 없다.

문장은 단어를 나열하여 사건이나 상태를 설명한다. 단어가 많아지면 기억하기가 어렵다. ‘하늘이 흐려지는 걸 보니 내일 비가 오려나 보다’라는 문장을 한 달 뒤에 똑같이 되뇔 수 있을까? 이걸 ‘하흐내비’라 하면 쉽다. 매번 속을 까보지 않아도 되는 캡슐처럼 복잡한 말을 단어 하나에 쓸어 담는다.

게다가 이전에 없던 개념을 새로 만든다. ‘시원섭섭하다’, ‘새콤달콤하다’ 같은 복합어가 별도의 감정이나 맛을 표현하듯이 ‘웃프다’, ‘소확행’, ‘아점’도 전에 없던 개념을 선물한다. ‘갑툭튀, 듣보잡, 먹튀, 낄끼빠빠, 엄근진(엄격+근엄+진지)’ 같은 말로 새로운 범주의 행태와 인간형을 포착한다. 애초의 말을 원상회복시켜도 뜻이 같지 않다. 발음만 그럴듯하면 독립한 자식처럼 자기 갈 길을 간다. 닮은 구석이 있어도 이젠 스스로 완전체이다.

언어를 파괴한다는 항의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호소가 있지만 축약어 만들기를 막을 도리는 없다. 말이 있는 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걱정이라고? 말은 지켜야 할 성곽이 아니라 흐르는 물. 지키거나 가둬 둘 수 없다.


“999 대 1”

어떤 언어든 ‘반드시’ 표시해야 하는 게 있다. 프랑스어는 모든 명사에 남성, 여성 중 하나를 꼭 표시해야 한다. ‘사과’는 여성, ‘사과나무’는 남성. ‘포도’는 남성, ‘포도나무’는 여성. 독일어는 남성, 여성, 중성 셋이다. ‘태양’은 여성, ‘달’은 남성, ‘소녀’는 중성! 이곳 사람들은 명사에 성 표시하기를 피할 수 없다. 페루의 어떤 원주민은 과거를 최근 한 달 이내, 50년 이내, 50년 이상 등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눠 쓴다. 셋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 써야 한다.

이렇게 반드시 표시해야 하는 요소들은 어릴 때부터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한국어에는 단연 ‘높임법’. 만만하면 반말, 두렵다면 높임말. 위아래를 항상 따져 묻는 사회, 위계 표시가 습관인 언어이다.

하지만 사회적 다수가 쓴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잘못 자리 잡은 것들도 많다. 이런 말들도 무조건 반사처럼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의식하면 알아챌 수 있고 다른 언어를 쓰는 의인을 만나면 고칠 수도 있다. 책 한 권 써서 출판하는 수업에서 있었던 일. ‘애인’을 쓰겠다는 남학생을 예로 들면서 ‘여친’이라고 부른 것이 문제였다. 한 학생이 내게 꾸짖기를, “당신은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겠지만 성소수자들은 ‘남자의 애인’을 곧바로 ‘여친’으로 치환하는 게 매우 불편하다. 999명에게는 자연스러운 ‘추리’지만 1명에게는 ‘배제’의 말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만나는 일상이다. 일상언어는 매 순간 우리를 소수자라고 확인시켜 준다.” 말에 반드시 표시해야 할 건 의외로 적다. 대부분은 통념과 편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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