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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돼지

잠시 눈을 감고 ‘날아다니는 돼지’를 떠올려보라. 뭐가 떠오르는가? 영화 <붉은 돼지>의 광팬이 아니라면 비행기를 조종하는 돼지가 떠오르지는 않을 거다. 날개가 달려 있던가? 어디에 달려 있던가? 배 밑인가 등 뒤인가? 몇 쌍이던가? 육중한 몸으로 날려면 힘이 꽤 들 텐데도 두 쌍이 아니고 왜 한 쌍만 달려 있을까? 입은 어떻게 생겼던가? 나와 비슷하다면 당신은 새 부리가 아니고 돼지 주둥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발도 새 발이 아니라 돼지 발일 테고. 깃털이 있으면 좋으련만, 피부는 어찌나 매끈한지.

세상 어디에도 ‘날아다니는 돼지’는 없다. 그게 중요하다. 없는데도 의미를 아니까 신통한 일이다. 흔히 말의 의미를 사물과 연결시킨다. ‘손톱’이 뭐냐고 물으면 ‘이거’ 하면서 손톱을 가리킨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돼지’에서 보듯이, 말의 의미는 사물로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결합한다. 돼지의 생김새와 새의 날갯짓을 합해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

그런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에 떠올리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침 밥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뜨끈한 국에 밥일 수도 있고, 식빵에 딸기잼일 수도 있고, 우유에 시리얼일 수도 있다.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은 사람마다 의미를 다르게 구성한다는 뜻이다. 경험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를 만든다. 같은 말을 써도 다른 의미를 떠올린다. 우리는 다 다르다. 그러니 내 말뜻을 못 알아듣는 상대를 너무 윽박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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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몽상

한글날이 답답하다. 물론 한글이라는 문자의 과학성은 탁월하다. 간결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예술 분야에서도 입증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국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해방 전후의 언어민족주의에서 달라진 게 없다. 언제 병들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로 언어를 보는 태도. 외부의 공격을 막고 내부 혼란을 응징하기 위해 법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순결주의.

모든 사람에겐 말을 비틀거나 줄이거나 늘리거나 새로 만들어 쓸 권리가 있다. 말을 변경하는 권리야말로 구태의연한 말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다. 그래서 이런 한글날을 몽상한다. 한국어를 단수가 아닌 무한수로 대함으로써 단일성의 고삐를 풀어주는 날. 규범과 명령의 족쇄에서 일탈과 해방의 카니발. 계급, 나이, 성정체성, 지역, 국가 따위의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난만히 피어나는 날. 아이의 말놀이처럼 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날.

굶주린 사람처럼 말에 대한 감각을 키우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음식맛을 백 가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밤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뼈를 깎는 개혁안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손톱을 깎았다’는 신박한 문장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책을 읽고 지인들 앞에서 한두 문장을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금지’와 ‘배제’의 안내판을 포용과 환대의 언어로 바꾸어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마치 외국어를 대하듯, 귀를 쫑긋하며 듣게 되는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의 문체와 말투를 열망하는 한글날이 되시길.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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