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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말의 기강

우리의 표준말 어휘 목록은 1936년에야 정비가 됐다. 이후 여러번의 개선, 보완, 수정 등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표준말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도 표준말 사정을 너무 서두르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표준말을 하루속히 제정하려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때 나온 ‘표준말 모음’은 우리 토착 어휘 6천여개를 목록화하여 비표준형과 함께 나란히 제시하고 어느 것이 표준형인지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김치’를 굵은 활자로 보여주고 그 곁에 작은 활자로 ‘짐치, 짐채’라는 비표준형을 나란히 실은 것이다. 이렇게 표준말이 확립된 덕분에 우리 한국어는 현대적인 체제를 갖추고 교육과 문학, 그리고 출판의 발전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가지 아쉬움도 외면할 수가 없다.

당시의 표준말 정비는 우리 토착어의 공식적인 형태를 확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다 보니 그 수많은 한자어와 외래어를 거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그 결과 토착 어휘는 사용될 때마다 표준형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게 됐지만 한자어와 외래어는 표준형 여부를 묻지 않는다. 그냥 한자로 쓸 수 있으면 자동적으로 표준어가 되었고 외래어는 괄호 속에 알파벳만 기입하면 잘못된 말도 그냥 표준어처럼 쓰인다.

마치 토착어는 지나다닐 때마다 검문과 검색을 일일이 받아야 하고 한자어나 외래어는 무비자로 입국한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통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한자어도 틀린 것, 너무 낡은 것, 뜻이 모호한 것, 전통 한자어와 통속 중국어 어휘 등 ‘표준형의 자격’을 잘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서양 외래어 같은 경우는 모호한 뜻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더 멋들어진 말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표준어의 기강이 무너진 것이다. 한자어와 외래어의 입국심사가 좀 더 엄격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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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신뢰

얼핏 보면 사람은 모두 돈이나 권력만을 믿고 사는 것 같으나 사실 마음속 깊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좀 더 지고지선한 그 무엇, 그 이상의 무언가를 뜻하는 단어를 품고 의지하려 한다.

옛날부터 ‘하늘의 뜻’이라거나 ‘충’과 ‘효’ 같은 말로 깊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대명천지에서는 그러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개인의 가치와 소망이 존중을 받는다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믿음과 의지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양심’과 ‘신념’이 아닐까 한다. 이 단어들은 특이하게도 여느 단어처럼 형태와 의미만 필요한 게 아니라 반드시 ‘신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말이다.

아무리 신앙이나 평화주의를 부르짖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온갖 불이익을 불사하고 내세우는 그들의 ‘신념’이 겨우 병역기피자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양심’이란 말에 비위 상해, 군대 간 사람이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하는 반문은 사리에 맞지도 않는다. 진짜 비양심적인 사람은 허위진단서를 내서 ‘공식적으로’ 병역을 기피하고도 감옥에 안 간 사람들이다. 많은 손실을 감수하고 내세우는 ‘양심’과 ‘신념’을 일단 경청할 필요는 있다.

그들에게 교도소에서 더 오래 근무하라는 둥, 양심이니 신념이니 하는 말을 빼라는 둥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익이나 욕망 외에는 아무런 ‘가치’나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일 뿐이다. 차라리 그들이 주장하는 양심과 신념을 이 사회에서 구현하도록 노력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을 만들어줄 여지는 없을까? 이 두 단어는 소시민들 마음에 남아 있는 이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신뢰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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