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5.20 13:19

말과 상거래

조회 수 148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말과 상거래

시장에서 상인은 고객을 끌려고 소리 높여 상품을 ‘선전’한다. 그리고 또 말로 씨름하며 ‘흥정’을 한다. 옥신각신하다가 ‘협상’에 성공하면 거래가 이루어진다. 종종 중간에 중개상이 끼어들기도 한다. 이래서 시장은 늘 말로 소란하고 시끄러웠다. 이런 시장을 단숨에 조용하게 만든 것은 ‘정찰제’였다. 고객은 살지 말지를 조용히 결정만 하는 피동적인 처지가 되었다.

말을 안 한다 해도 조금씩 말하는 틈새가 생겼다. 계산대에서 포인트가 있냐는 둥, 회원 카드가 있냐는 둥 하며 자잘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점원과 잡담을 나누는 단골도 생겼다. 또 틈틈이 ‘행사’를 기획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작은 시끄러움마저 날려버린 것이 바로 ‘자판기’이다. 인간의 상업 활동이 이렇게까지 비언어적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고객은 더욱 소외되어갔다.

한술 더 떠 이제는 ‘언택트’라는 용어도 나타났다. 점원이 고객한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을 삼가는 서비스를 말한다. 마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기특한 생각 때문이란다. 일인 가구 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고객의 언어는 점점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언어로 화려한 수사와 형용을 하게 만들던 ‘상업’이 너무 점잖아진 것이다.

고객들은 어느새 광고와 전자 거래, 직구, 택배 등의 포위망에 갇혀 말을 잃고 있다. 이제 고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시장의 선전과 광고만이 요란하다. 현대의 고객들은 자신의 큰 무기였던 ‘흥정’을 어느 결에 잊었다. 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스스로 힘을 잃게 된다. 고객들도 보장된 언어적 권리를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상품 정보, 반품 조건, 유효 기간 등을 꼼꼼하고 치열하게 따지지 않으면 시장에서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시장에서는 언어가 돈보다 더 중요한 무기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293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967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4374
3194 기림비 2 / 오른쪽 風文 2020.06.02 1653
3193 남과 북의 협력 風文 2022.04.28 1653
3192 영어 공용어화 風文 2022.05.12 1653
3191 '김'의 예언 風文 2023.04.13 1654
3190 ○○노조 風文 2022.12.26 1655
3189 위탁모, 땅거미 風文 2020.05.07 1656
3188 방언의 힘 風文 2021.11.02 1656
3187 주권자의 외침 風文 2022.01.13 1659
3186 공적인 말하기 風文 2021.12.01 1665
3185 무술과 글쓰기, 아버지의 글쓰기 風文 2022.09.29 1666
3184 '바치다'와 '받치다' file 風文 2023.01.04 1672
3183 질문들, 정재환님께 답함 風文 2022.09.14 1673
3182 우방과 동맹, 손주 風文 2022.07.05 1674
3181 “힘 빼”, 작은, 하찮은 風文 2022.10.26 1680
3180 통속어 활용법 風文 2022.01.28 1683
3179 한글의 역설, 말을 고치려면 風文 2022.08.19 1683
3178 드라이브 스루 風文 2023.12.05 1685
3177 뒤치다꺼리 風文 2023.12.29 1686
3176 한 두름, 한 손 風文 2024.01.02 1691
3175 보편적 호칭, 번역 정본 風文 2022.05.26 1694
3174 ‘맞다’와 ‘맞는다’, 이름 바꾸기 風文 2022.09.11 1694
3173 가족 호칭 혁신, 일본식 외래어 風文 2022.06.26 169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