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09.07 22:59

편한 마음으로

조회 수 86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편한 마음으로

 어느 기관의 직원 모집에 무려 4500여명이 응시했다. 마침 어느 고위층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사람을 위해 전화로 부탁을 해주었는데, 1차 서류 전형에서 겨우 2299등을 한 그 인턴이 무리한 성적 조작의 반칙을 통해 최종 합격자 36명에 포함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합격되었던 응시자 셋이 떨어졌다고 한다.

 황당한 것은 이것을 수사한 검찰의 태도다. 전화로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류 조작을 시킨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부탁한 사람은 빼고 성적을 조작한 사람들만 기소하는 모양이다. 그 까닭을 검찰은 그 고위층이 ‘그저 편한 마음으로 부탁한 것’이라고 둘러대어 주었다.

 한쪽이 편한 마음으로 부탁했는데, 부탁받는 상대방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들어주어야 하는 사안으로 받아들였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다. 갑과 을의 균형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부탁’이라는 언어행위는 상대방에게 결정권이 있는 경우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혀 그러한 힘이 없는 약자이면서 강자에게 그러한 ‘부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부탁조의 협박이거나 명령이다. 조폭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요즘 바쁜가봐!”라는 말 한마디에 얼른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인사와 답례인가? 권력과 굴종의 대칭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상징 아닌가?

언어는 형식적 규정만 잘 맞는다고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열린 사회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소통을 위한 언어가 된다. 공정해야 할 공직사회에서 이렇게 ‘암흑가의 대화’ 같은 표현이 횡행하며 젊은이들의 취업 활동을 방해한 것은 분명히 권력 남용이자 공중의 이익을 거스른 짓이다. 그리고 검찰은 말의 뜻을 교묘하게 틀어버림으로써 더 중요한 자신의 의무를 포기했다. 법이 언어를 지키지 못하면 언어도 법을 지키지 못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7484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397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8937
268 파이팅 바람의종 2009.06.01 8784
267 파이팅, 오바이트, 플레이, 커닝 바람의종 2008.09.23 8694
266 파천황 바람의종 2007.09.04 9696
265 파투 바람의종 2007.09.04 9740
264 파티쉐 바람의종 2009.09.18 10163
263 팔색조 바람의종 2009.10.07 7911
262 팔염치, 파렴치 / 몰염치, 염치, 렴치 바람의종 2012.10.02 15948
261 팔자 바람의종 2007.09.08 8862
260 팥죽에 새알심 바람의종 2010.11.01 11141
259 패랭이꽃 바람의종 2008.02.11 8896
258 패수와 열수 바람의종 2008.04.29 10293
257 패였다, 채였다 바람의종 2009.07.14 8970
256 패이다 바람의종 2008.12.11 14749
255 퍼드레기 바람의종 2012.09.28 12752
254 퍼센트포인트 바람의종 2011.11.24 13284
253 퍼주기 바람의종 2008.12.08 6825
252 펜치 바람의종 2009.04.03 9330
251 펴다와 피다 바람의종 2012.11.27 50774
250 편견의 어휘 風文 2021.09.15 938
» 편한 마음으로 風文 2021.09.07 861
248 평가하다, 때문에 바람의종 2008.11.21 7538
247 평등을 향하여 風文 2021.11.02 152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38 139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