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09.02 22:50

대명사의 탈출

조회 수 9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대명사의 탈출

 

‘나와 너’, ‘여기와 저기’와 같은 말을 대명사라고 한다. 대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위치에 따라 말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일컬을 때는 분명히 ‘나’였는데, 남이 나를 부를 때는 ‘너’가 된다. 또 ‘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실체는 그대로인데 누가 어디에서 나를 호출하느냐에 따라 어휘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관계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대명사보다는 아예 이름을 말한다. 

 

관계를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퍽 까다로운 일이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인칭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동사가 얼마나 귀찮았던가. 그들의 언어는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동사의 성격을 다르게 본 것이다. 대명사가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면 명사는 그 관계를 무표정하게 만든다. 그냥 ‘집’이라 하면 건축물로서의 ‘집’이다. 그러나 ‘우리 집’이라고 하면 ‘우리’의 소유 대상이거나 거주 공간이다.  이러한 대명사들이 그 ‘관계의 표지’를 품에 안은 채 명사의 구역으로 자꾸 탈출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우리’라는 말을 특정 정당과 은행의 이름에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요기요’, ‘여기 어때’, ‘여기다’ 같은 대명사가 마치 명사인 듯이 응용프로그램(앱) 이름에 등장했다. 품사의 경계를 넘나들면 기능이 중복되게 마련이다. 심지어 지방의 어느 지역을 지나가다가 ‘거기’라는 모텔 이름도 본 적이 있다. “우리 ‘거기’ 갈까?” 하는 소박한 문장 안으로 모텔의 의미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말의 성격이 슬슬 변하고 있다. 서로의 관계를 보여 주는 대명사가 에일리언처럼 명사(상품명)의 몸에 들어가 소비자들을 낚아채려 한다. 소비자들은 대명사 때문에 그 상품과 자신이 유의미한 관계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원래 소비자와 관계 깊던 대명사가 상품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1533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804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2999
3194 삼디가 어때서 風文 2022.02.01 1350
3193 좋은 목소리 / 좋은 발음 風文 2020.05.26 1351
3192 북한의 ‘한글날’ 風文 2024.01.06 1352
3191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風文 2022.06.20 1353
3190 되묻기도 답변? 風文 2022.02.11 1354
3189 남과 북의 협력 風文 2022.04.28 1354
3188 ‘이’와 ‘히’ 風文 2023.05.26 1354
3187 도긴개긴 風文 2023.05.27 1354
3186 영어 공용어화 風文 2022.05.12 1360
3185 무술과 글쓰기, 아버지의 글쓰기 風文 2022.09.29 1362
3184 ‘~스런’ 風文 2023.12.29 1363
3183 한글의 약점, 가로쓰기 신문 風文 2022.06.24 1366
3182 “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風文 2022.12.02 1366
3181 한소끔과 한 움큼 風文 2023.12.28 1366
3180 돼지껍데기 風文 2023.04.28 1367
3179 통속어 활용법 風文 2022.01.28 1368
3178 인쇄된 기억, 하루아침에 風文 2022.08.12 1375
3177 공적인 말하기 風文 2021.12.01 1375
3176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風文 2023.04.18 1376
3175 ‘나이’라는 숫자, 친정 언어 風文 2022.07.07 1378
3174 마녀사냥 風文 2022.01.13 1381
3173 지슬 風文 2020.04.29 138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