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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의 용어, '학번'

대학의 입학 연도를 가리키는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출신 학교의 이름과 함께 하나의 중요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동시에 동문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오래전에는 쓰이지 않던 말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대학에 늦게 진학하는 사람도 많아서 동급생들끼리도 나이 차이를 중요시했다. 그러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쯤에 널리 번졌다.

누구나 학교에 입학하면 으레 그 햇수가 있기 마련이니만큼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 용어가 공식적인 신문 보도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저명인사들의 프로필에도 함께 등장하는 말이 된다면 그 의미와 기능을 한번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다. 그렇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용법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공직자를 설명하는 공식 용어로는 사려 깊지 못한 말이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검정시험 출신자들에게는 개념이 잘 들어맞지도 않는다. 또 학제가 다른 외국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도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하다. 학사편입이나 복학을 한 사람들은 두 개의 학번에 연고가 생긴다. 그리 유용하거나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물론 학번이라는 말은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 특히 같은 학과 출신들끼리 동문의 안부를 주고받을 때는 그런대로 유용한 말이다. 따라서 매우 사적인 용도로만 제한되는 것이 옳다.

마치 누구네 집 몇 번째 자식이냐는 말이 가족이나 친척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공식적인 인물 정보에서는 불필요한 요소이듯이, 또 이력서에서 개인 증명사진이 인사 결정 과정에서 오히려 용모에 대한 선입관만 주기 쉽듯이, ‘학번’이라는 용어를 공식 보도나 문서에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공적인 판단을 불러올 수 있다. 이제는 공적 소통 과정에서 지워 버리는 게 마땅한 사사로운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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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과 생태계

우리의 표준어 원칙에는 ‘서울말’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바로 서울말인지 명확한 정의나 해석이 달려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서울말이 아니면 모두 사투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다. 표준어 사용의 근본 취지가 모든 사용자들의 편의와 언어적 공감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서울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서울말임에도 표준어가 못 된 경우도 있고, 시골말인데도 표준어나 다름없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각 지방의 특유한 토산품이나 음식 또는 동식물의 이름 등은 불가피하게 표준어와 사투리의 경계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용한 의미를 가진 방언 어휘들은 너무 주눅 들 필요 없이 당당히 사용할 수도 있는 근거도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농촌에 가면 ‘둠벙’이라는 것이 있다. 논밭 근처에다가 물을 모아놓은 우묵한 곳인데 간이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을 주제로 하는 영상물을 보면 생태계의 오아시스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사물에 엄밀하게 해당하는 서울말은 찾을 수가 없다. 사전을 보면 ‘둠벙’을 그냥 ‘웅덩이의 방언’이라고만 설명하고 있다. 중심부 아닌 지방, 도시가 아닌 농촌이 가진 역동적인 생태계를 메마르고 협소한 도시의 언어로 표현하자니 어쩔 수 없이 웅덩이라는 맥 빠진 말로 나타내게 되었다. 도시에서도 어린이 생태 교육을 위해서라도 이젠 ‘도시 둠벙’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판이다.

표준어가 진정 표준이 되려면 풍부한 형태와 의미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표준어는 근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울 중심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지만 더 풍부한 지혜와 감성을 품기 위해서는 방언에 대한 문호개방이 더욱 필요하다. 농촌의 삶이 도시에서보다 더 슬기로울 가능성이 높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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