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도리
옛날 서적을 읽다 보면 오늘날 쓰지 않는 말들이 나타날 때가 적잖다.〈열녀춘향수절가〉에서 이도령이 천자문을 읽자, 방자가 한 마디 던진다. “여보 도련님, 점잖은 사람이 천자는 또 웬일이오?”, “소인놈도 천자 속은 아옵네다.” 그러고는 “높고 높은 하늘 천, 깊고 깊은 따 지, 홰홰 칭칭 가물 현, 불타것다 누루 황”이라고 읽는 모습은 가히 웃음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은 한문 공부의 첫걸음이라고 할 ‘천자문’ 풀이조차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라 문’이다.
홍양호의 〈북색기략〉에는 함북 방언에 문(門)을 뜻하는 ‘오라’가 있고, 덕(德)을 뜻하는 ‘고부’(高阜)가 있다고 한다. 함북 방언은 조선 초기 육진을 개척할 때 경상도 사람을 이주시켰으므로 신라 고어라고 할 수 있다. 황윤석은 영남 인본 천자문을 바탕으로 ‘오라’가 영남 고어라고 하였고, 객사에서 아이들이 대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도 풀이하였다. 이처럼 ‘문’을 ‘오라’로 풀이한 예는 더 발견되는데,〈석봉 천자문〉의 ‘오라 문’이나,〈소학언해〉의 ‘문 오래며 과실 남글’[門巷果木]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 김윤학 교수 연구에서, 강화 화도면에 ‘오랫도리’라는 밭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 동네 들머리에 놓인 이 밭을 ‘출입문에 해당하는 밭’이라고 생각하며 ‘오랫도리’라 불렀다는 것이다. ‘도리’는 ‘둘레’란 뜻이므로, ‘동리로 드는 문의 주위에 놓인 밭’이다. 땅이름에 우리말이 화석처럼 깃든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 목록 | 바람의종 | 2006.09.16 | 41412 |
공지 |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 바람의종 | 2007.02.18 | 187780 |
공지 |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 風磬 | 2006.09.09 | 202922 |
264 | 두꺼운 다리, 얇은 허리 | 風文 | 2023.05.24 | 1104 |
263 | 한국어의 위상 | 風文 | 2022.05.11 | 1103 |
262 | 붓다 / 붇다 | 風文 | 2023.11.15 | 1103 |
261 | 국민께 감사를 | 風文 | 2021.11.10 | 1102 |
260 | 어떤 문답 | 관리자 | 2022.01.31 | 1101 |
259 | 이름 짓기, ‘쌔우다’ | 風文 | 2022.10.24 | 1101 |
258 | 삼디가 어때서 | 風文 | 2022.02.01 | 1100 |
257 | ‘나이’라는 숫자, 친정 언어 | 風文 | 2022.07.07 | 1099 |
256 | 무술과 글쓰기, 아버지의 글쓰기 | 風文 | 2022.09.29 | 1099 |
255 | 형용모순, 언어의 퇴보 | 風文 | 2022.07.14 | 1098 |
254 | 영어 공용어화 | 風文 | 2022.05.12 | 1097 |
253 | 뉴 노멀, 막말을 위한 변명 | 風文 | 2022.08.14 | 1097 |
252 | 도긴개긴 | 風文 | 2023.05.27 | 1096 |
251 | 언어적 적폐 | 風文 | 2022.02.08 | 1094 |
250 | ‘부끄부끄’ ‘쓰담쓰담’ | 風文 | 2023.06.02 | 1094 |
249 | '마징가 Z'와 'DMZ' | 風文 | 2023.11.25 | 1092 |
248 | 새말과 소통, 국어공부 성찰 | 風文 | 2022.02.13 | 1091 |
247 | 이단, 공교롭다 | 風文 | 2022.08.07 | 1088 |
246 | 부동층이 부럽다, 선입견 | 風文 | 2022.10.15 | 1084 |
245 | 드라이브 스루 | 風文 | 2023.12.05 | 1081 |
244 | '넓다'와 '밟다' | 風文 | 2023.12.06 | 1081 |
243 | 본정통(本町通) | 風文 | 2023.11.14 | 1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