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땅이름
물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생명과 다름이 없다.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늘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바탕이 물이다. 흔히 종교 행사로 치르는 ‘세례’ 또한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균여전>의 ‘항순중생가’에도 ‘대비 물로 적시어 이울지(시들지) 아니하겠더라’라는 시구가 나온다.
땅이름에 물과 관련된 것은 매우 많다. ‘물’의 옛말은 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수성군’(매홀군), ‘매소홀현’(미추홀), ‘수곡성현’(매탄홀), ‘이천현’(이진매현)에 포함된 ‘매’(買)는 모두 ‘물’을 표기한 보기들이다. 그런데 이 낱말의 음은 산을 나타내는 ‘뫼’와 유사하며, 들을 나타내는 와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을 뜻하는 가, 산이나 들의 ‘뫼’와 처럼 ‘미’로 변화할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미’로 변화하지 않고, ‘믈’을 거쳐 ‘물’로 변화한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해답은 언어 변화의 기능 부담과 관련지어 풀이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하나의 낱말 형태가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담당할 경우, 서로 다른 꼴로 나타내는 것이 효율적이므로, ‘산’과 ‘들’, 그리고 ‘물’을 모두 ‘미’로 일컫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나리’에서 온 ‘내’는 오랫동안 땅이름에 남는다. 예를 들어 ‘모래내’, ‘연신내’, ‘오목내’처럼, 물줄기를 뜻하는 ‘내’는 오늘날에도 자주 들을 수 있는 땅이름이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국어학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 목록 | 바람의종 | 2006.09.16 | 38339 |
공지 |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 바람의종 | 2007.02.18 | 184898 |
공지 |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 風磬 | 2006.09.09 | 199794 |
3278 | 사라져 가는 한글 간판 | 風文 | 2024.01.06 | 868 |
3277 | ‘선진화’의 길 | 風文 | 2021.10.15 | 869 |
3276 | 울면서 말하기 | 風文 | 2023.03.01 | 871 |
3275 | 우방과 동맹, 손주 | 風文 | 2022.07.05 | 873 |
3274 | 영어 열등감, 몸에 닿는 단위 | 風文 | 2022.04.27 | 876 |
3273 | 있다가, 이따가 | 風文 | 2024.01.03 | 877 |
3272 | 주어 없는 말 | 風文 | 2021.11.10 | 878 |
3271 | 더(the) 한국말 | 風文 | 2021.12.01 | 880 |
3270 |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 風文 | 2023.02.27 | 880 |
3269 | 가던 길 그냥 가든가 | 風文 | 2024.02.21 | 880 |
3268 | 거짓말과 개소리, 혼잣말의 비밀 | 風文 | 2022.11.30 | 881 |
3267 | 김치 담그셨어요? | 風文 | 2024.02.08 | 882 |
3266 | 갑질 | 風文 | 2024.03.27 | 884 |
3265 | 반동과 리액션 | 風文 | 2023.11.25 | 885 |
3264 | 왕의 화병 | 風文 | 2023.11.09 | 889 |
3263 | 뒤죽박죽, 말썽꾼, 턱스크 | 風文 | 2022.08.23 | 890 |
3262 |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 風文 | 2022.08.28 | 890 |
3261 | ‘시월’ ‘오뉴월’ | 風文 | 2024.01.20 | 892 |
3260 | 대명사의 탈출 | 風文 | 2021.09.02 | 893 |
3259 | 비판과 막말 | 風文 | 2021.09.15 | 894 |
3258 | 야민정음 | 風文 | 2022.01.21 | 897 |
3257 | 깨알 글씨, 할 말과 못할 말 | 風文 | 2022.06.22 | 897 |